国家AAAA级旅游景区

공원 소개

 

고 백 (古 柏)
서기10세기의 북경은 요(療)나라의 배도(陪都)로 이름은 “남경(南京)”이었다. 이곳은 당시 도성(都城) 동북쪽 교외의 “흥국사(興國寺)”사원이었고, 이곳의 몇 그루 측백나무는 요(療)사원의 유물로 그 중 나무의 둘레가 가장 굵은 것은 약 6.33m이다.


괴백합포(槐柏合抱)
“괴백합포(槐柏合抱)”는 중산공원(中山公園)에서 가장 흥미로운 식물 경관으로, 홰나무가 측백나무 나무줄기의 틈새에서 자연적으로 자라서 형성된 것이다. 


당화오(唐花塢)
당화오(唐花塢)는 1915년에 건축되었고 1936년에 중산공원(中山公園)에서 재건되었으며, 물 옆의 생화온실로 그 중 당(唐)은 당(煻)과 같은 의미로 ‘불로 말린다’는 뜻이고, 오(塢)는 ‘물가의 건축물’을 뜻한다. 재건한 당화오(唐花塢)는 소박하고, 장엄하고 우아하며, 철강콘크리트구조로 공작새의 깃털과 같은 초록색 유리기와, 평면은 제비날개형, 가운데는 록정(盝頂)식 2층 8각의 정자형태이다. 당화오(唐花塢)는 상시로 유명화초와 테마별 화분전시를 한다.


습례정(習禮亭)
습례정(習禮亭)은 각 지역 문관과 무관이 황제를 참배하는 예절의식을 습득하고 연습하는 곳으로, 청(淸)나라 때 홍로사(鴻胪寺) 아문(衙門) 내에 있었는데 후에 예부(禮部)로 옮겨졌다가 1915년에 중산공원(中山公園)으로 다시 이전되었다.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은 서기 1420년인 명(明) 영락(永樂) 19년에 건조되었다. 사직단(社稷壇)은 <주례(周禮)> “좌조우사(左祖右社)”제도에 따라 건조한 것으로 그 내외의 단(壇)은 고궁(故宮) 동쪽의 태묘(太廟)인 지금의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과 좌우로 대칭된다. 사(社)는 토신(土神)을 대표하고 직(稷)은 곡신(谷神)을 대표하며 단(壇)내에는 한백옥(漢白玉)으로 구축된 3층 정사각형의 오색토(五色土) 단대(壇臺)가 있다. 그 위에는 다섯 색갈의 흙을 중간에는 황색,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 5개 방향에 깔아 “천하의 토지는 모두 천자의 것이다.(普天之下, 莫非王土)”를 상징한다. 오색토(五色土) 중앙의 네모난 돌기둥을 “사주석(社主石)” 또는 “강산석(江山石)”이라고 하는데 이는 “강산영고(江山永固)”를 뜻한다. 명ᆞ청(明淸) 나라의 황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이곳에서 사직(社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행한다.


보위화평방(保衛和平坊)
보위화평방(保衛和平坊)의 원래 이름은 “극임덕비(克林德碑)”이고 1903년에 창건하였다. 1900년 6월, 청(淸)나라 군인 은수(恩壽)가 의화단진압운동에 참여한 독일 공사 극임덕(克林德)을 살해하였다. 1902년, 청(淸)정부는 11개 제국주의나라와 주권을 상실한 치욕스러운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했는데 그 중에 “극임덕(克林德)을 위하여 비석을 세우다”라는 조문이 들어 있었으며 얼마 후 동단북대가 서총부호동 서구외(東單北大街 西總部胡同西口外)의 큰 거리에 거리 넓이만한 극임덕(克林德)비석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후인 1919년에 동 비석을 중산공원(中山公園)으로 옮겨오고, “협약공리전승기념방(協約公理戰勝紀念坊)”으로 이름을 고쳤다. 1952년,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ᆞ태평양 지역평화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이 비석을 “보위화평방(保衛和平坊)”으로 이름을 고쳤다. “보위화평(保衛和平)” 네 글자는 곽말약(郭沫若)의 칠필이다.


격언정(格言亭)
격언정(格言亭)은 1915년에 창건되었고 1918년에 중산공원(中山公園) 옮겨왔으며 약언정(藥言亭), 약석정(藥石亭)이라고도 한다. 원래 돌기둥 안쪽에 선인(先人)의 격언이 새겨져 있었는데 신중국 성립 초기에 지워버렸다.
여덟개 기둥위에 씌여 있는 격언은 아래와 같다. 주자(朱子)의 말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을 ‘충 (忠)’이라 하고, 그러한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을 ‘서 (恕)’라고 한다.맹자(孟子)의 말씀: 한 나라의 근본은 가정에 있고 또 가정의 근본은 자신의 한 몸에 있다.자사(子思)의 말씀: 이미 배운 내용을 잘 익히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 알아간다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양명(陽明)의 말씀: 생각은 행동의 시작이고, 행동의 생각의 결과이다.단서(丹書)의 말씀: 부지런한 자는 길하고 게으른 자는 망한다.무목(武穆)의 말씀: 문관(文官)은 돈을 탐내지 않고 무관(武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정자(程子)의 말씀: 하나에 주로 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고, 마음을 한 데 집중하여 잡념을 버리는 것을 ‘일(一)’이라 한다.공자(孔子)의 말씀: 자고로 모두에게 죽음이 있지만, 백성이 믿어주지 않으면 설 수 없다.


난정팔주정(蘭亭八柱亭)
난정팔주정(蘭亭八柱亭)은 원래는 원명원(圓明園)의 유물이었다. 정원의 석비 정면에는 진(晉)나라 영화(永和) 9년의 《난정수설도(蘭亭修褉圖》와 《머리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가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여덟개 기둥에는 각기 당(唐)나라 서예가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 풍승소(馮承素), 유공권(柳公權)이 진(晉)나라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를 모사한 것과 명(明)나라의 동기창(董其昌)이 유공권(柳公權)의 난정시(蘭亭詩)를 모사한 것과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가 모사한 “난정집서(蘭亭集序)”와 “난정시(蘭亭詩)”가 새겨져 있다.


청운편(靑云片)
청운편(靑云片) 석(石)은 이화원(頤和園)의 “청지수(靑芝岫)”석(石)과 함께 자매석(姊妹石)으로 불리우고 있다. “청운편(靑云片)”석(石)은 북경 방산(房山)에서 나온 것으로, 기세가 드높고 변화무상하며 마치 한점의 푸른 구름같기도 하다. 청운편(靑云片) 석(石)은 명(明)나라 태복(太僕) 미만종(米萬鍾)이 수집한 놀이석인데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 때 원명원(圓明園) 내의 시상재(時賞齋) 앞으로 옮겨왔다. 그러다가 1925년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중산공원(中山公園)으로 옮겨왔고 1971년에 이 곳으로 옮겨왔다. “청운편(靑云片)”세 글자는 청(淸)나라 건륭(乾隆)황제가 칠필한 것으로 돌 위 에는 건륭(乾隆)황제가 쓴 여덟 수(首)의 시(詩)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풍화가 되였다.


청연타(靑蓮朶)
청연타(靑蓮朶) 석(石)은 북경 원림 명석(名石) 중의 보물이다. 남송(南宋) 시기에 임안 [臨安, 오늘날의 항주(杭州)] 송고종(宋高宗) 조구(調構)의 덕수궁(德壽宮) 내의 이 보물을 “부용석(芙蓉石)”이라고 하였다. 1751년,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가 처음으로 남방을 순찰할 때, 이 석(石)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여 북경으로 운송하여 원명원(圓明園) 서원(茜園) 태허실(太虛室) 앞에 두었으며 “청연타 (靑蓮朶)”라고 이름을 지었다. 1927년에 청연타(靑蓮朶) 석(石)을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중산공원(中山公園)으로 옮겨왔다. 청연타(靑蓮朶) 석(石)은 무늬가 교차적으로 잘 배열되어 있으며 특히 금방 비를 맞은 후에는 윤기가 도는데, 옅은 분홍색이 나며 마치 희미한 저녁 노을 같고 돌무늬에 섞인 백색의 점은 하얀 눈과 같아서 실로 보기드문 명석(名石)이다. “청련(靑蓮)”은 불경에서 지혜라는 뜻이므로 “청련 재모(靑蓮在眸)”는 바로 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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